등대에 몸바친 30년 이송균, 은퇴 후 변치 않은 등대사랑 강용정

소설가 앤 라모트는 “희망은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라고 말했다. 전설적인 그룹 너바나 리드싱어 커트 코베인은 “태양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한 줄기의 빛이 내게 비춰졌다.”라고 말했다.

희망의 등대는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뿜어내며 제 역할을 시작한다. 어둔 밤바다를 항해하는 마도로스의 영원한 동반자는 등대다. 노을이 지고 어둠이 내리면 등대가 불을 밝힌다. 수평선에 해가 뜨면 밤새 쉬지 않고 빛 무리를 돌리던 등대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불빛을 끈다. 등대를 관리하는 사람은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으로 공식 명칭은 등대관리원이다. 그러나 국민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되는 노래가사처럼, 희망과 나눔의 전도사로 한 생애를 살아온 사람에게 명예로운 상징어는 등대지기일 것이다.

이송균소장의 애환이 서린 마라도등대

 

남쪽바다 같은 섬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남도의 바다를 비추는 희망의 등대지기로 살아온 ‘전설의 등대지기’가 있다. 항일의 섬으로 널리 알려진 전남 소안도에서 태어나 최남단 섬 마라도 등대와 우도 등대를 지켜온 이송균 소장. 그리고 같은 섬 소안도에서 태어나 무인도와 먼 바다의 섬들을 떠돌며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선박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온 강용정 소장이 그 화제의 주인공들이다.

이송균 전 마라도등대 소장은 우도등대를 끝으로 등대원 30년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완도군 소안도에서 태어나 목포공고 건축과를 나온 그는 평생 섬에서 등대지기로 지냈다. 등대소장 정년퇴임 후에도 사설 등대관리 회사에서 제주지역 등대업무를 총괄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는 마라도 등대원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전기가 귀해 풍력발전기 도면을 직접 그려가며 설계에 몰입했다. 사비를 털어 진행하던 작업이었다. 빚도 졌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아내는 운명에도 없는 해녀생활을 했다. 아내와 함께 빼 놓을 수 없는 일과가 양동이를 들고 마라도에서 말똥과 마른 나무 가지를 줍는 일이었다. 외딴 섬에서 땔감이 귀했기 때문이다. 화산섬 마라도는 물이 귀하고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등대원 박봉의 월급으로 사는 일은 표현할 수 없이 힘든 길이었다. 첫 딸이 돌이 채 지나기도 전이었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자신이 만든 풍력발전기 프로펠러에 막내둥이 얼굴이 5㎝가량 찢긴 일이다. 어린 딸을 보듬고 배를 타고 제주도로 나가 병원을 전전했지만 치료가 불가능했다. 다시 서울의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해결책이 없었다. 그 상처는 딸이 성장해도 얼굴에서도 그의 가슴에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 딸이 시집가던 날, 그 흔적을 바라보며 속으로 참 많이도 울었다.

등대 앞 바다의 파도소리만 우는 게 아니다. 그렇게 등대원들은 가장으로서 늘 가슴 속에서 파도가 치고, 그런 파도를 피해 안전한 항해를 소망하던 선박들의 길라잡이 역할을 위해 최선을 다해 365일 등대 불빛을 밝혀야 한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헌신적 삶, 이를 천직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 등대원들의 아름다운 여정이다.

그는 마라도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어선을 구하기도 했다. 동료들은 엔진 고장이라고 분석했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아니야. 연료가 바닥난 것”이라며 기름이 귀하던 그 시절에 등대에 보관된 석유를 준비해 어선을 지원하고 인근 가파도 섬으로 안전하게 귀항시킨 적이 있었다. 그리고 호주머니를 털어 등대에 비치된 석유 예산을 채워 넣었다.

그렇게 등대에서 평생을 보낸 이송균 소장은 마침내 등명기 차단기를 창안했다. 등명기는 등대 불빛이 4면으로 반짝이는 전구 역할을 한다. 전류를 타고 올라가 빛과 열을 방출하는 필라멘트 같은 역할을 한다. 이 등명기 가격은 4억 원에 이르는 등대의 핵심부품. 그는 등명기의 초점이 태양고도와 일직선에서 마주치면 타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태양고도가 수평으로 맞을 시 차광막에 의해 자동으로 불이 꺼지도록 설계했다. 해양수산부는 이 아이디어를 중요한 가치로 여겨 당시 제주일원의 모든 등대에 이 기술을 시범 운영했다.

마지막 근무지 우도등대에서 이송균소장

 

그의 마지막 근무지인 우도등대에서 만난 추자도 출신의 김순일 등대원은 “이송균 소장님은 일생동안 등대를 업그레이드 하는 일에 온몸을 바쳤고 모든 등대원들의 사표”라고 극찬했다. 갈수록 등대는 첨단화의 길을 걷고 원터치 자동화시스템으로 무인등대로 전환되는 추세다. 비록 기기는 첨단화 되어 갈지라도 등대원들의 휴머니즘, 그런 휴머니즘적인 등대원의 노고가 밑거름이 되어 뜨겁고 아름답게 빛나는 등대 불빛... 그 등대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지혜와 사랑의 참 의미만은 영원히 불을 지펴 키워나가야 할 일이다.

‘등대지기’라는 별명이 영원히 어울리는 휴머니즘의 상징이 강용정 소장이다. 등대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가 없는 인물이다. 등대소장으로 정년퇴임 후에도 전국의 모든 등대원의 메신저와 등대문화를 전승하는 거점으로서 사단법인 한국등대협회를 만들어 이끌며 변치 않은 등대사랑의 길을 걷고 있다.

강용정 소장은 스물여섯에 등대지기가 됐다. 완도군 소안도 부속 섬 당사도에서 태어났다. 당사도는 일본 등대지기를 사살한 항일유적지 등대로 역사적 명소. 그는 가난한 섬 소년, 섬 청년생활에도 진보잡지 <사상계>를 허리춤에 끼고 살았고 시를 외우며 고뇌에 찬 날들을 보냈다.

그가 등대원이 되어 받은 첫 월급은 쌀 한말 값 정도. 번민과 절망을 반복하던 그는 당사도 등대 절벽 아래로 몇 번씩 뛰어내리려다 실패했다. 답답하고 외로울 때마다 부서지는 파도를 보면서 “저 파도가 바로 나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 첫 부임한 섬은 무인도 칠발도. 야생초와 야생동물만 사는 섬에서 온몸에 풀독이 올랐다. 사방에는 풀, 나무, 바위, 바람뿐이었다. 마실 물도 없어 빗물을 정화해서 생활했다. 등대 빛의 에너지원인 액체 축전지가 터져 한쪽 눈을 잃기도 했다. 구급약도 배편도 없던 그 시절에 그는 무인도에서 사흘을 홀로 몸부림치다가 구조신호를 보고 다가선 공공선에 실려 병원으로 실려 갔다. 생활고 탓에 수술은 엄두도 못 내고 영영 한쪽 눈을 잃은 등대지기로 살았다.

마지막 근무지 가사도 등대에서 강용정 소장

 

그가 잃어버린 것은 눈뿐만이 아니었다. 비바람 거세게 몰아치던 어느 날, 발전기를 돌리다가 손가락이 잘려나갔다. 발전기가 고장 난 날은 혹시 있을지 모를 조난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밤새워 손으로 등대를 돌리던 그였다. 눈을 부상당한 후 병원에 드러누웠을 때 헌신적으로 보살펴 주었던 간호사가 지금의 아내이다. 그는 그 수호천사에 대해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고맙고 미안하기 그지없는 인생의 동반자”라고 표현했다. 그 수호천사는 6년간 등대에서 함께 생활하다가 자녀교육문제로 육지로 떠났고, 그는 다시 섬이 되어 긴 세월을 보냈다. 나는 강 소장을 주인공으로 몇 편의 시를 써 발표했는데 그 중 ‘길 잃은 등대지기’라는 시이다.

“스물여섯 살에 칠발도 등대지기가 되었다/풀독 온몸에 올라 고요한 초원에 병들던 인연/마음의 거울처럼 밤낮으로 닦던 축전지가 터져/한쪽 눈을 잃은 등대지기//유일한 섬의 친구인 새들도 길을 잃어/등대 아래서 세상을 뜨곤 했다/새들의 이별도 이별이지만/고장 난 발전기를 돌리다가/한쪽 손가락 또 잃은 등대지기//뭍으로 가도 천상 섬이라던 등대지기가/떠난 그곳이 섬인가/그가 머문 그곳이 천상 섬이런가/괭이갈매기 고장 난 등대 위를 맴돌고/바닷길 밝히던 등대지기는 지금/한쪽 눈으로 횡단보도를 걷는 섬이다”

그는 비번이거나 휴가 때 목포 집에 머물면 홀로 섬이 되어 지냈다. 한 쪽 눈을 잃은 그는 집 밖으로 나가면 그 자신이 섬이 되어 온전하지 못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근무한 곳은 진도 가사도 등대. 나는 그가 마지막 근무한 날에 맞춰 서울에서 아침 일찍 새마을호를 타고 목포를 향해 내달렸다. 기상상태가 좋지 않아 정기여객선이 운항하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다시 진도 가학리 포구로 방향을 틀었다. 이장에게 부탁해 개인 배를 타고 거센 파도를 헤쳐 등대로 향했다. 작은 선외기는 파도가 높아 말 달리듯이 부웅붕 떠다녔다. 그렇게 거친 파도를 헤쳤다. 얼마 후 등대 아래 해안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가 손을 흔들었다.

산길을 걸어 등대 숙소에 당도하자, 강소장은 그물을 쳐서 잡은 농어와 간재미회를 내주었다. 나는 서울에서 공수해간 술잔을 내었다. 밤새 취해가며 구슬픈 노래를 많이도 불렀다. 창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밤새 등대지기가 된 사연, 등대에서 보낸 35년의 생활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강용정 소장과 수호천사 아내

 

그런데 웬걸, 폭풍주의보가 내렸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홍도등대에 갔다가 일주일 동안 발이 묶여 등대에서 그와 생활하며 첫 인연이 되었는데...함께 간 일행들의 다음 일정 탓에 꼭 섬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트럭을 불러 큰 마을로 내려가 어제 타고 온 선외기를 불러 등대를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그도 영원히 그 등대를 떠났다.

평생 등대지기로 살아온 그의 마지막 등대에서의 기억을 살려 쓴 시가 ‘그리운 가사도 등대’이다.

“진도 가학 포구에서 5인승 선외기를 탔다/서로 묶여 통통 뛰는 통통배 깃발이 물새 떼를 풀어놓고/학꽁치 배때기 뒤집어 쌓고 물보라 치는/날 빛 파도 위에서 한통속으로 출렁이며 가는데/솔향기 익어가는 등대 아래서 밤 깊도록/섬 그림자 돌리며 먼 바다에 사랑의 편지를 썼을/등대지기가 손 흔들며 서 있다//성에 낀 창가에 파도소리 부서질 때마다/안개꽃 흐드러지고 우리는 파도소리 데피며/밤새 푸른 소주를 마셨다/비바람 치는 밤 뜨거울 때마다 비에 젖어간 등대지기/고도에 부릅튼 등대의 눈시울 닦아주며 마음 쓸어내렸을/섬지기 35년, 이 섬과 작별하는 마지막 날 소주잔만큼/이제 떠나고 나면 무인도 아닌/무인등대로 남을 가사도 등대//우리는 서로의 눈시울 바라보며 소리 높여 노랠 불렀다/사람은 뭍으로 떠나고/등대는 결국 섬으로 돌아가는 거라고/헤어져 섬으로 돌아가기 위해/등대는 저토록 뜨겁게 젖어 우는 거라며/그렁그렁 눈빛에 술잔 돌릴 때마다/하잔한 가사도의 파도소리 올연히 부서지고 있었다” - ‘그리운 가사도 등대’, 시집 「포구의 아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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