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풍경이 있는 아침] 21 박상건, 겨울양수리

나는 두근거리는 눈발로 흔들리며 십이월의

강을 건넌다

제 몸 낮춰 등 내밀어 주며 층층이 눈길을 내는

눈발,

눈발 분무질하는 춘천행 마지막 기적소리에

메밀꽃 같은 그리움 피었다 사라지고

뗏꾼들 녹슨 주전자에 한사발의 눈발 노적봉처럼 쌓여 간다만

차창에 박제된 양수리의 겨울은 떠날 줄 몰랐다

마음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할 때, 눈발도

양수교 불빛줄기에 걸려 넘어지고

자갈들 악다물고 뒤척여 상처 난 언 강에

눈발 내려앉을 때마다 살얼음장 움찔대는 것이지만

빈 나루터에 하얀 빵모자를 쓴 갈대 밑뿌리

구들장 실핏줄로 뻗어 출혈의 강 당겨 생잎 한 장씩을 키워 냈다

밤새 휘몰이 한 눈발들, 용문사 범종소리에 영혼의 햇살로 깨어나

일제히 강비늘 헤치며 연등 꼬리표처럼 나부꼈다

노을과 비바람 눈보라이거나 햇무리를 위하여

늘 강벌 비워두고 흐르는 강에

눈발,

지상의 모든 이름들 지워 가는 것이 아니라

남한강 북한강이 서로 이마를 맞대듯이,

제 가슴 내려놓고, 뜨거운 혈맥으로 깊어 가는 것이다

- 박상건, ‘겨울 양수리’ 전문

 

겨울 양수리

 

18년 전, 동해 일출을 볼 수 없다는 뉴스에 기차 대신 양수리행 버스를 탔었다. 눈발은 정신없이 내리고 춘천가도는 빙판길이었다. 바람 나뒹굴고 버스 공회전도 야단법석이었다. 양수교 건너 한 카페에서 혼술로 추위도 녹이고 갈증도 풀었다. 빈 가슴에 취기 오르면 친구와 선배들에게 전화질하는 버릇이 이때부터 생겼다. 아마도 불혹의 고갯마루에서 거친 삶의 유속을 체감하며 술잔처럼 흔들렸을 터. 지친 몸을 이끌고 강변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창틈으로 흐르는 바람소리는 내 마음을 거세게 흔들어쌓았다. 언강 위로 싸래기 눈발이 휘날렸다. 버드나무 아래 두툼한 눈들은 서로를 보듬고 졸고 있었다.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카페촌으로 향했다. 늘 그렇듯, 광화문우체국에서 사온 한 무더기 엽서를 꺼내 벽난로 옆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지난해 고마움과 새해 행운을 소망하는 편지를 썼다. 그렇게 한동안 양수리에서 연하장 쓰던 버릇이 생겼다. 지천명 언덕배기 내리막길에서는 남한강 북한강이 서로 이마 맞대고 무심히 흐르는 두물머리의 묵언수행만 바라볼 뿐이다.

글, 사진: 박상건(시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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