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혁명 100주년 특집 ② [박상건 시인의 섬과 등대여행] 24 전남 소안면 당사도

등대는 밤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주로 위험한 해안선, 급류와 암초, 항구와 방파제, 외딴섬 등에 세워진다. 등대는 일본이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빌미로 우리나라 개항과 해안측량, 항구에 거주한 일본인을 위해 설치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은 청일전쟁 때 우리 땅으로 전쟁 물자를 실어 나르던 중 조난사고가 잇따르자 우리 측에 등대 설치를 강요했다. 우리 국민들 노동력을 착취해 강압적으로 등대를 세우면서 섬 주민들은 격분했고 마침내 등대를 습격하는 등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본지는 ‘3․1혁명 100주년’을 맞아 항일운동의 현장인 전남 소안도, 당사도, 당사도등대 편을 3회에 걸쳐 특집으로 연재한다.

당사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에 속한 섬이다. 완도읍에서 20.8㎞, 소안도 남서쪽으로 약 3.5㎞ 해상에 있다. 섬 면적은 1.46㎢, 해안선 길이 8㎞. 북쪽으로 보길도에 딸린 무인도 예작도, 복생도, 항도가 예쁜 분재처럼 푸른 해역에 출렁인다. 당사도는 완도 화흥포에서 배를 타면 노화도를 거쳐 1시간 20여분 소요된다. 당사도는 직항로가 없다. 노화도 동천항 또는 소안도 선착장에서 당사도로 가는 배를 갈아탄다.

당사도 등대 모습
당사도 마을

 

당사도 원래 이름은 ‘항문도’였다. 을사늑약 이후 소안도 맹선리에 소규모 군항을 구축하고 ‘항구의 문’, 즉 제주방면에서 들어오는 첫 관문이라는 뜻에서 항문(港門)도라 불렸다. 그러나 어감이 좋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이름을 바꿨는데 공교롭게도 자지(者只)도였다. 두 마리 까치를 닮았다는 뜻의 작이(鵲二)에서 자지(者只)로 변했다. 구순의 할아버지는 “당사도라고 하믄 시방도 모르는 늙은이들이 많어. 여그서는 자지도라고 하제. 섬 모양새가 ‘다만 지(只)’자와 비슷해서 그렇케 부른 것이제”라고 말했다.

아무튼 당사도는 1982년 지금처럼 고쳐 불렀다. 당사도에 주민이 살기 시작한 것은 1500년경 청주한씨가 섬에 들어오면서 부터. 인근 섬과 제주도로 항해하는 선박의 피항지로 이용하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훨씬 이전에는 귀양 가다가 이곳 맑은 물과 경치에 반해서 살게 되었다고도 전한다. 아무튼 지금도 외진 섬이면서 물맛 좋고 산수화 같은 풍경을 연출하는 섬의 자태만은 예나지금이나 한결같다.

마을은 매우 소박하고 향토적인 전통어촌의 모습이다.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 촬영지인 당사도는 영화처럼 유채꽃 피고 보리밭이 일렁이며, 염소와 송아지는 풀을 뜯어 먹는 그렇게 평화롭고 목가적인 섬이다. 당사도 사람들은 이 영화에 모두 단역으로 출연했었다. 당사도 사람들은 제작진들이 잠 잘 곳이 없자 주민 개개인이 집 방 한 칸씩을 내주어 함께 생활했다.

당사도에 도착한 철부선
당산도 전경. 맞은편 섬은 보길도

 

집집마다 주황색 하늘색 빨간색 등 눈부시게 원색적 양철지붕 모습이 그림 같다. 집집마다 마당 화단에는 금잔화 동백 철쭉 강낭콩 유자나무 한 그루 정도는 있을 정도로 친자연적이다.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장작불을 지피며 산다. 선착장에서 돌담길 따라 오르는 그날도 집집마다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을언덕에 올라보면 당사도는 푸른 후박나무 팽나무 그늘 아래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나무 사이로 보이는 푸른 바다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차 한 대 정도 가까스로 갈 수 있는 시멘트 길을 오르자 오른쪽에 한국전력 당사도 태양광발전소발전소 가 있고 그 앞에 책을 읽는 소녀상이 있었다. 예전의 초등학교 분교 터이다.

김과 미역을 일본에 수출하던 산업화 시절에 500여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기도 했던 당사도에는 학생들도 많았다. 공립 고등학교가 있었을 정도이다. 당사도는 행정구역으로는 소안면 당사리가 공식명칭이고 2월 현재 37명의 주민이 산다.

당사도 사람들의 주 소득원은 멸치, 삼치, 도미, 볼락 어업과 김과 미역, 다시마양식이다. 당사도 앞바다는 전복 양식장이 주를 이루지만 바다를 앞에 두고 산다고 해서 모두 바다에서 양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설비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 그래서 다른 마을에 양식장 터를 팔아 고기잡이를 하거나 해안가에서 수산물을 채취하여 내다 판다.

주민들은 협소한 농경지를 이용해 밭농사를 지으며 동서남북으로 펼쳐진 해양자원을 잘 활용하는 상호보완적인 적응능력을 키우며 살아왔다. 등대로 가는 산길로 조금 오르면 오른쪽 밭에 물탱크가 있다. 전기는 태양광, 식수는 마을 정관에서 물을 끌어올려 저장했다가 사용한다.

동천항을 향하는 여객선에서 본 동천항을 출항한 배
등대로 가는 숲길 초입

 

마을 중턱 산을 가로질러 등대로 향했다. 산속에 당숲이 있었다. 당사도 사람들은 매년 음력 섣달그믐날 이곳에서 당제(堂祭)를 지낸다. 이날은 저마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무사안일을 빈다. 신성한 곳이기에 여태껏 나뭇가지 하나 꺾지 않으며 숲을 수호신으로 모셔왔다. 선착장과 물양장을 지을 때 비용을 마련하려고 섬에 있는 후박나무를 베어냈을 때도 이곳만은 손대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이렇게 무병과 풍농, 풍어를 기원하는 마을공동의 제사로 지내오고 있다.

가난하던 그 시절에 다행히 산림이 우거져 땔감을 팔아 끼니를 이어갔다. 당사도 이장 김성도씨는 “김포에서 조선소를 운영하다가 IMF를 만나 도산한 후 당사도에 와서 재기했죠. 저에게는 아주 고마운 섬이죠.”라고 말했다. 한 때는 좋은 나무가 많아 당사도 땅을 사는 외지인들이 많았단다. 어쨌든 나무가 많다보니 물맛이 좋다. 그러나 당사도 앞바다는 급류가 흐른다.

70~80년대 그 시절에는 초가지붕을 엮어 살았는데 해남에서 짚을 사서 돛단배에 싣고 당사도 앞 급류해역을 건너오다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무사히 등대 불빛을 받아 건너온 날은 이엉을 다 엮고 난 후 행복한 마음으로 막걸리를 마시며 덩실덩실 춤추며 축제를 즐겼단다. .

어부가 그물로 잡은 물고기를 어창에서 꺼내는 장면

 

김성도 이장과 함께 구순을 넘긴 한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정말 힘든 시절을 회고했다. “주민들은 우거진 산뿐인 이곳에서 먹고 살 일이 막막했지라우. 대부분 남자들은 뭍에 나가서 머슴살이 했제. 일해 준 대가로 곡물을 얻어야 했승께.” 바다에 나가면 지천으로 먹을 수 있는 해산물이 많았지만 난바다였고 채취를 해온다 해도 뭍으로 나갈 재간이 없었다. 섬에서 섬으로 다시 섬에서 섬으로 건너 해남 땅으로 가야 하는데 운송수단이 없었다. 말 그대로 섬처럼 살았다.

마을에 고구마를 심으면서 뭍으로 머슴살이를 나가지 않아도 됐다. 고구마에 보리나 콩을 곁들여 먹기도 하고 김치를 얹어 먹기도 했다. 고구마는 주식이었다. 생각 끝에 주민들은 산을 깎아 공동으로 밭으로 개간했지만 물을 가둘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비가 오면 빗물이 고이도록 넓적한 돌 위에 흙을 깔고 다시 돌을 깔고 흙을 까는 방식으로 생존을 위한 한 뙈기씩의 밭을 만들어 나갔다. 그것이 오늘의 얼마 안 되는 저 구들장 땅이다.

하루 두 끼 이상을 고구마에 의존하던 삶은 쌀과 보리를 섞어 먹을 정도로 발전했고 12월 말부터 5월까지는 바위에 나붙은 김 채취에 매달렸다. 지금까지도 청정바다 당사도에서 생산한 김은 유명하다. 특히 두 번째 채취하는 ‘두벌김’이 빛깔 좋고 맛이 좋아서 예약제로 다 팔려나갈 정도란다. 이런 천혜의 푸른 해역 탓에 제주도와 인근 섬 해녀까지 당사도로 물질을 원정 올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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