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풍경이 있는 아침] 29, 이성부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이성부, ‘봄’ 전문

 

이성부 시인은 1942년 광주에서 출생했다. 광주고 문예반 시절 문순태 소설가와 단짝이었다. 시인은 고교 때 <전남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됐고 경희대 국문과에 특기생으로 입학했다. 학보사 기자와 경희문학상 수상, 대학생 때 <현대문학> 재등단했고 제대 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했다.

시인은 2012년 2월 28일 별세했다. 7년 동안 암 투병했다. 위독하다는 전갈에 그해 2월 15일 서울대 병원으로 병 문환을 갔었다. 시인은 나에게 “7년 동안 많이 살았다....상건아, 술 아껴 먹어라”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해 송수권 시인은 “아까운 시인 한 분 사라졌다”고 애석했다. 얼마 후 송시인도 떠났다. 두 분은 생전에 ‘섬사랑시인학교’의 버팀목이었다.

이성부 시인은 ‘산(山) 시인’으로 유명지만 섬도 아주 좋아했다. 이따금 시인들이 그에게 “산 시인이 왜 섬에 다니느냐”고 물으면 “섬도 물에 뜬 산”이라고 말하곤 했다. 시인은 처음부터 산을 주제로 시를 썼던 것은 아니다. 광주항쟁 때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로 10여 년간 절필하며 산을 타기 시작했다.

‘봄’은 경희대 앞 친구 자취방을 전전하던 시절, 힘들었던 청년시절에 썼다고 했다. 교과서에 실리고 수능에서 출제된 작품이지만 시인은 “힘든 그 시절을 담아냈을 뿐”, ‘민주주의=봄’, 이런 도식화에는 쓴 웃음을 짓곤 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오는 게 계절이다. 때가 되니 봄이 오고 그렇게 사계절은 순환한다. 그러니 매사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오지만,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라면 더욱 특별하게 다가설 것이다. 굶주리고 눈칫밥도 먹어보고, 속울음으로 진탕의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봄=자화상’이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오는 봄은 그렇게 모든 이의 마음을 빛나게 은유한 것이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인생무상 새옹지마. 고진감래라면 너무 눈부셔서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은 당연지사. 그렇게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은 너와 나이고 우리네 봄이다. ‘봄의 시인’은 봄이 오는 길목에서 이승과 작별했다. 인생은 사필귀정이다.

 

글, 사진: 박상건(시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저작권자 © 리빙T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