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풍경이 있는 아침] 35 유안진, ‘지란지교를 꿈꾸며’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는 것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 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나며,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 유안진, ‘지란지교를 꿈꾸며’ 중에서

 

 

지란(芝蘭)은 영지와 난초이다. 모두 향기가 많은 풀이다. ‘지란지교’는 벗과 벗 사이의 고상한 교제를 뜻한다.

유안진 시인은 난초처럼 ‘단아한 내적 아름다움의 시인’이다. 젊은 날에는 누구보다 쓰디쓴 인생살이를 헤쳐왔다. 안동 양반가 딸로서 홀로 외지생활을 해야만 했던 유년기와 지독한 가난, 병고에 시달렸던 세월들이었다. 시인이 예순을 훌쩍 넘긴 어느 날에 서울대 연구실로 찾아갔었는데 정년을 앞두고 스승 박목월 시인을 떠올리며 “이제 시만 쓰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시인, 수필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한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작품은 ‘문학사상’에서 마감을 앞두고 펑크 난 원고를 메꾸려고 편집장이 갑자기 글 하나를 청탁한 것인데 시인은 밤새 촛불 아래서 이 글을 써내려갔다. 그렇게 명작이 탄생했다. 이 작품은 당시 초중고생 책받침과 공책에 인용돼 불티나게 팔렸고 중고등학교, 재수학원, 기업 등에서 명상의 시간에 애국가 버금으로 전 국민이 암송하고 음미하던 단골 시낭송 작품이었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흉보지 않을 친구.”,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그런 친구를 노래한 이유는 지면상 생략한 문장에서 등장한다.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 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경쟁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되, 미친 듯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요란한 빛깔과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기에....

정녕, 그런 친구만 있으면 되는 것은 “많은 사람과 사귀는 것도 원치”않고 “일생에 한 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죽기까지 지속되길”바라기 때문. 그렇게 사랑하다가 친구가 떠난다면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나며,/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라고 믿기 때문이다.

글, 사진: 박상건(시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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