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풍경이 있는 아침] 김명인, '동두천1'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중략)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 김명인, ‘동두천1’ 중에서

기찻길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번쩍이는 신호등/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그렇게 시인은 역에서 오가는 기차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다. 신기루 같은 눈발은 “내리는 눈일 동안만” 깨끗한 것이다.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지는 눈발은 이내 진창이 되고 만다. 우리네 인생살이가 그렇듯, 시인은 ‘저탄 더미’에 쌓이는 눈발과 녹아서 눈물이 되는 장면을 통해 혼혈아의 서러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잠시 사랑했던 미군은 바다 건너 본국으로 갔다. 나만이 가장이 떠난 ‘배고픈 고향’에 남아 서양인의 피가 섞인 자식과 살아간다. 백의민족이 아니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어서 ‘더러운 그리움’이 되고 만다. 그래도, 저탄 위 눈발은 무심히 녹고 숱한 인생사가 기차와 함께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간다.

이 시는 ‘문학과지성 시인선’ 9번째 시집에 실렸다. 시인의 ‘동두천’ 연작시 9편은 동두천 미군부대 일대 기지촌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것이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시를 통해 왜 주한미군이 존재하는지를 되물었다. 이후에 다른 작품에서 민초들의 삶을 주로 노래했다.

경기도 북부에 있는 ‘동두천’은 분단의 상처가 아로새겨져진 땅이다. 민족적 비극인 6·25전쟁에 개입한 미국부대가 아직도 머물고 있다. ‘양공주’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혼혈아가 태어나고 분단 역사가 생생하게 각인된 무대이다.

시인은 대학 졸업 후 동두천 한 고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혼혈아 문제와 맞다드렸다. 검은 저탄 위로 내리는 눈은 혼혈아의 눈물이면서 분단조국의 눈물이면서 시인의 눈물이다. 1970년대 유신체제 상황에서 살아가는 시인과 미군부대 밑바닥 삶을 살던 사람들의 아픔을 중의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반세기가 흘렀지만, 아픔 채 지워지지 못했다. 2019년 다문화 학생 수는 12만2212명. 전국적으로 저 출산문제가 심각하지만 다문화 학생은 계속 늘고 있다. 국내 체류 외국인 수는 2021년 300만 명을 넘어선다. 대한민국은 ‘단일민족 국가’에서 ‘다문화 국가’로 변모 중이다.

김명인 시인은 1946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고대 국문과를 졸업한 후 경기대 국문과 교수를 거쳐 현재 고려대 세종캠퍼스 교수로 있다. 시인은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출항제’가 당선되어 시단에 나왔고 시집으로 ‘물속의 빈 집’, ‘머나먼 곳 스와니’, ‘길의 침묵’, ‘여행자 나무’, ‘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 등이 있다. 목월문학상,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서문학상, 소월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글, 사진; 박상건(시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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