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건 시인의 섬과 등대여행] (54) 연평도 등대

옹진군 연평도는 인천항에서 122㎞ 떨어진 해상에 있다. 여객선으로 2시간 소요된다. 본래 해주군에 속했던 연평도는 8.15 해방 후 38선 이남지역으로 옹진군에 편입됐다. 6.25전쟁 때는 수 만 명의 피난민이 연평도를 거쳐 남하했다. 휴전 후 연평도는 계속 대한민국에 소속되었다. 주민의 70% 가량은 황해도 출신의 실향민과 그 후손들이다.

무인도 구지도
대연평도 전경

 

연평도는 평평하게 뻗친 섬이라는 뜻이다. 면 소재지 섬인 본섬 대연평도와 부속 섬 소연평도로 이뤄졌다. 전체 섬 면적은 7.4㎢이고 경기만 북서쪽 대연평도는 6.14㎢이다. 북방한계선과 불과 3.4㎞ 떨어져 있다. 흔히 ‘연평도’라 하면 대연평도를 말한다. 대부분 주민이 이 섬에 거주하는데 2019년 9월 현재 1,350세대에 2,102명이 살고 있다.

주민들은 대부분 꽃게잡이와 굴, 바지락 등을 채취하며 산다. 연평도는 우리나라 꽃게 어획량의 약 8%를 차지한다. 연간 조업일수는 180일로 4~6월과 9~11월에 조업을 한다. 나머지 기간은 산란기로 조업이 금지돼 있다.

연평도는 뭍에서 머나먼 거리의 섬이지만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3대 황금어장으로 통했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섬에서 다수의 토기가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추정한 것이다.

조선 인조대왕 14년(1636년) 임경업 장군이 이 섬에 들어와 조기를 발견한 후 섬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조기잡이를 하며 살기 시작했다. 조기의 섬 연평도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토산으로 조기가 주의 남쪽 연평평(延平坪)에서 나고, 봄과 여름에 여러 곳의 고깃배가 모두 이곳에 모이어 그물로 잡는데, 관에서 그 세금을 거두어 나라 비용에 쓴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기와 임경업 장군 그리고 연평도의 역사와 삶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다. ‘강화도 배치기소리’에서도 거기와 임 장군이 등장한다. “어기차 닻차 닻감아 싣고/연평바다로 조기 잡으러 간다/삼국충신 임장군이/김선주 불러서 도장원 주었다/명을 받았소 명을 받았소/임장군 전에서 명을 받았소”

임경업 장군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안긴 청나라를 치기 위해 명나라로 가던 중에 군사들이 군량미가 바닥났다고 하자, 안목바다 당섬에서 가시나무를 꺾어 바다에 꽂게 한 후 조수에 밀려오는 조기떼를 잡았다. 이 방식을 ‘어살법’이라고 부르고 임 장군은 연평도 사람들에게 이 방식을 가르쳐줘 조기잡이 시초가 되었다.

유서 깊은 당도와 책도, 모이도
조기파시 때 연평도 풍경(골목길 벽화)

 

그렇게 조기를 잡던 안목어장은 연평도 면소재지 앞 바다를 말하는데, 당섬, 책섬, 작은지리 등의 작은 섬들에 둘러싸여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다. 바다가 깊지 않아서 썰물 무렵에는 조개, 게, 낙지 등 가족단위 갯벌체험이 가능하다.

안목어장 북동쪽 바닷가에 우뚝 솟은 언덕에 망향전망대가 있다. 북한 땅을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실향민들이 북녘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는 곳이다. 전망대를 내려와서 왼쪽 해안선을 타고 돌아가면 철책선 너머로 손가락 모양의 아이스크림바위가 보인다. 그리고 개목아지낭이라는 섬 끝자락에는 점점이 하얗게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바로 백로이다. 이곳이 백로서식지이다.

그리고 연평도 포격 당시 전사자 위령탑이 있는 평화공원, 이곳에서 잠시 분단과 그 때의 아픔을 달래고 털어낸 후 오른쪽 숲길을 더 걸어가면 연평도 등대를 중심으로 꾸민 등대공원과 등대 옆쪽에 조기 역사관이 있다. 연평도는 안보관광지로 부각되곤 했지만 천혜의 해안경관이 아름다운 섬이다.

연평도는 해방 전후부터 1968년 전까지 황금의 조기파시 어장이었다. 멀리 평안도, 함경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등 팔도에서 수 천척의 어선이 조기 떼를 쫒아 앞바다를 메웠다. 이런 풍경은 마을 골목길 벽화와 사진, 조기 역사관을 통해 생생하게 감상 할 수 있다. 파시가 성행하던 시절에 어부들은 돈이 하도 많아서 지폐를 화장지 대용으로 썼고, 길을 가다가 졸리면 돈주머니를 배게 삼아 잤다는 스토리를 소개한다. 그리고 청정바다 진면목까지 보여준다.

연평도 등대로 가는 길
병풍바위와 가래칠기 해안

 

등대와 조기 역사관은 연평도 최고 전망 포인트이다. 연평도 대표적 해안절경을 이곳에서 조망할 수 있다. 호젓한 산길을 타고 내려가면서 삼림욕을 즐기고 야생화를 구경하면서 해안선 여행이 이어진다. 병풍바위, 기암괴석, 갈매기가 절벽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닮은 가래칠기 해변이 펼쳐진다.

이 일대는 군부대 경비철책 구역으로 일반인 출입이 금지됐다가 일부 개방된 구간이다. 해안 을 따라 푸른바다를 직접 걸어보고 백사장과 해산물을 캐보는 해양체험도 할 수 있다. 특히 북쪽 해안의 구리동해수욕장은 물 맑고 고요한 숨어 있는 비경의 백사장이다. 백령도 사곶해변과 함께 군용기 이착륙이 가능한 밑바닥이 탄탄한 모래톱이다.

등대에서 가래칠기해변으로 가는길
연평도 숨겨진 비경 구리동 해변
얼굴바위

 

최근 해병대의 시설물 중 한 곳을 리모델링하여 여행객에게 제한적으로 공개하고 있는데 등대 아래서 긴 터널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포격장비가 전시되고 전방은 바로 북한 방향의 NLL 부근임을 실감한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분단조국임을 전율하며 체감한다.

이 모든 연평도 역사와 어부들 삶의 여정 속에서 묵묵히 동행하며 바다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것이 연평도 등대이다. 등대는 1960년 3월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 찬란한 황금어장을 굽어 비추어주던 등대는 1970년대 이후 남북 간 군사적 대치가 심화되면서 1974년 더 이상 불빛을 켜지 못했다. 그렇게 1987년 4월 등대의 역할마저 멈췄고 시설물도 폐쇄됐다.

그렇게 답답하게 어둠이 오고 안개가 자욱해도 빛도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침묵한 연평도 등대는 45년 만인 2019년 5월 17일 19시 20분 다시 불을 켜게 됐다. 조기파시 어장의 황금시대를 밝혔던 연평도 등대의 명성을 되찾았다.

이 역사적인 재점등 기념일에는 해양수산부 장관을 비롯해 인천시, 옹진군 관계자, 어업인 등 60여 명이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등대 마지막 근무자였던 김용정 전 등대소장에게는 감사패가 수여됐다. 그는 1973년부터 2년간 연평도 등대에서 근무하며 연평어장의 조업 안전을 위해 노력했던 주인공이다.

연평도 등대는 해발 105m 지점에 위치한다. 9.5m 높이 등탑으로 일몰 시각부터 다음날 일출 시각까지 15초에 1회 주기로 연평도 해역에 불빛을 비춘다.

해병부대에서 내려다 본 무인도
철책선 너머로 보이는 북한 땅

 

남북 간 갈등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연평어장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 9.19 군사합의 등으로 남북 간 긴장이 완화되면서 다시 ‘평화의 바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올해 3월에는 남북 긴장 완화를 반영한 실질적 조치로 서해5도 어업인의 숙원이었던 어장 확대 및 야간 조업시간 연장이 결정되었다.

연평도 등대는 불빛이 발사되는 각도를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하고 불빛이 도달하는 거리37Km 연평어장까지로 정했다. 유사시 군(軍)이 원격으로 소등할 수 있는 안전장치도 마련했다.

연평도 등대

 

연평도가 안보관광지로 부상하면서 등대를 군부대로 안으로 이전하려는 작업도 있었지만 이념을 초월한 등대정신에 걸맞게 연평도 등대는 본래 그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하게 됐다. 이제 등대의 고유 역할인 연평어장과 서해 북단 해역에서 조업하는 선박의 안전을 지키며 해양번영의 길을 여는 ‘희망의 불빛’으로, ‘희망의 등대’ 역할을 다할 것이다. 그렇게 한결같은 등대의 정신을 실천할 것이다.

그 섬, 연평도로 가는 길은 거리가 멀고 배편이 많지 않다. 섬에 머무는 시간 또한 촉박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연평도 여행은 기본적으로 1박 2일 일정을 짜야 한다. 옹진군에서는 이런 여행자의 고충을 고려해 대연평도를 포함 서해 5도를 여행할 경우 하루 이상 머무는 여행자에 게는 예매 때 여객 운임을 50% 할인해준다. 물론 섬 안에는 민박, 펜션, 식당, 매점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이제 우리 어촌의 역사와 어민의 삶이 생동하는 그 섬, 그 등대로 한번 떠나보자. 문의: 연평면사무소(032-899-3450)

글, 사진: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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