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풍경이 있는 아침] 이정록, ‘세수’

빨랫줄처럼 안마당을 가로질러

꽃밭 옆에서 세수를 합니다, 할머니는

먼저 마른 개밥 그릇에

물 한 모금 덜어주고

골진 얼굴 뽀득뽀득 닦습니다

수건 대신 치마 걷어올려

마지막으로 눈물을 찍어냅니다

이름도 뻔한 꽃들

그 세숫물 먹고 이름을 색칠하고

자두나무는 떫은맛을 채워갑니다

얼마나 맑게 살아야

내 땟국물로

하늘 가까이 푸른 열매를 매달고

땅 위, 꽃그늘을 적실 수 있을까요

- 이정록, ‘세수’ 전문

 

이정록 시인의 시집 ‘풋사과의 주름살’(문학과 지성사, 1996)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어린 시절 고향집에는 스테인리스 세숫대야와 찌그러지고 양은 세숫대야가 있었는데, 할머니는 늘 볼품없는 세숫대야로 세수를 했다. 세수를 한 후 마른 수건은 식구들에게 양보하고 당신은 꾀죄죄한 치마에 눈물샘을 씻곤 했다.

이 시는 60~80년대 고향풍경을 아주 정겹고 애잔하게 묘사했다. 잔잔한 가락의 마디마디마다 가난을 넘어서는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가장은 늘 속울음은 가슴 깊이 눌러둔 채, 식솔들에게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일찍이 시인은 할머니 사랑 속에서 체득한 휴머니즘 탓에 보다 멀리 세상을 바라다보는 안목을 키웠다. 그렇게 배인 숱한 체험과 애환은 시인만의 타고난 창작의 근원이 되었다. 시인이 생산하는 많은 시편들은 자연에서 길어 올린 풍경들이다. 삶의 소소한 소재도 시인의 감성과 영혼에서 행구고 나면 한 폭의 아름다운 액자가 되어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시인은 자연, 특히 농촌 소재들을 감칠맛 나는 가락으로 엮어내는 미학적이고 아포리즘적인 서정시를 선보였다. 그는 한 언론사와 시민단체 초청 특강에서 “평소 하는 일 중 가장 앞자리에 두고 실천하는 것이 글 쓰고 생각하는 일”이라고 토로했다. “글 쓰고 생각하는 내용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을 수도 없이 하지만 결론은 사람으로 귀결된다”라고 말했다.

이정록 시인은 1964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고려대대학원 문학예술학과를 수료했고 현재 천안중앙고 교사로 재직 중이다.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박재삼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풋사과의 주름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제비꽃 여인숙’, 동시집 동시집 ‘콧구멍만 아프다’, 산문집 ‘시인의 서랍’, 동화 ‘귀신골 송사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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