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풍경이 있는 아침] (49) 이승철, ‘어느 지천명의 비가’

오십 줄 다 되도록 이만큼 버텨 왔다면 한세상 용케도 잘 살아왔다는 그 말씀. 세상이 온종일 아우성치는데 메마른 땅에서 샘물을 파듯 너는 오늘도 한 뿌리 시를 찾아 헤매고 있나.

- 이승철, ‘어느 지천명의 비가’ 중에서

 

이 시는 이승철 시인의 시집 ‘그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나는 1987년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시인과 인연을 맺었다. 긴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따금 전화통화만 해오다가 올 가을 초입에 시인에게 안부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인사동에서 한 잔 술에 추억의 날들을 안주로 삼아 되새김질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안부를 물을 찰나에 건네받은 시집에는 저간의 사연이 일기처럼 서술되고 재생 파일처럼 술술 풀어졌다. 시집은 농익은 막걸리에 취할 때로 취하고 거기에 다시 찬 소주를 차곡차곡 채워 신열의 땀방울이 흐르는 것처럼 전율했다. 세월은 흘렀어도 32년 전, 그 때 20대 청년의 열정이 여전히 넘쳐흘렀다. 그렇게 이 풍진세상을 뜨겁게 살아왔다.

‘어느 지천명의 비가’에서 시인은 좀 더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고백했다. “오십 줄 다 되도록 이만큼 버텨 왔다면 한세상 용케도 잘 살아왔다는 그 말씀” 더 물어 무엇 하랴. 그렇게 사는 일은 버티는 일이고 버티는 힘은 비울 수 있는 힘이다.

‘지천명’까지 무겁지 않게 살아와서 버틴 것이다. 지난한 삶들을 함축한 시어와 가락의 밑뿌리에는 시인만이 속으로 호흡하는 실핏줄들이 흐르고 있을 터. 세상은 “온종일 아우성치는데 메마른 땅”이고 “샘물을 파듯” 오직 “한 뿌리 시를 찾아” 나섰다. 여기서 ‘시’는 ‘희망’의 동의어이다.

공자는 쉰 살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고 해서 ‘지천명’이라고 표현했다. 시인은 만 59세임으로 지천명이지만, 우리 나이로는 이순(耳順)이다. 60세 이순은 들리는 것이 모두 순해졌다는 뜻이다. 도리에 순응한다는 의미다.

박철 시인(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장)은 “늘 이승철 시인의 이면을 주시해왔다”면서 “어떤 침묵 뒤에 숨은 요란보다 요란 뒤에 숨은 침묵을 찾아가는 길의 모습, 그 이면 속에 숨겨진 그의 비수를 느낄 때마다 참 삶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평했다.

도리에 순응하는 삶의 이면이 무엇인지 잘 표현해주고 있다. 이승철 시인이 순응하는 도리의 구체적 모습은, 불의로 가득 찬 시대의 한복판에서는 샘물 같은 시를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것이다. 그 여정에서 숱한 사람과 조우하며 사선의 삶과 포개지고 때로 불꽃을 그으며 살아왔다. 그렇게 지천명하고 이순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오십 줄 다 되도록 이만큼 버텨 왔다면 한세상 용케도 잘 살아왔다는 그 말씀.”

이승철 시인은 1958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1983년 무크지 <민의>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세월아, 삶아’, ‘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 ‘당산철교 위에서’, 육필시집 ‘오월’, 산문집 ‘이 시대의 화두-58개띠들의 이야기’ 등이 있다. 현재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이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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