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건 시인의 섬과 등대여행] (59) 경주시 감포읍 송대말등대

저만치 감포 송대말등대가 시야에 들어오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윽고 보슬비가 꽃비처럼 흩날렸다. 해안 길을 타오르자 부처의 미소처럼 등명기는 머금은 불빛을 천천히 분출하기 시작했다.

송대말등대 전경

 

등대 사무실에서 직원이 전해주는 따뜻한 커피 한잔에 몸을 녹이면서 창밖의 감포 바다를 바라본다. 드넓은 암초지대가 펼쳐졌다. 항해하는 선박에게 위험지역임을 알리는 무인 등표가 설치됐다. 이곳은 일출 포인트이기도 하다. 연말연시 사진작가들이 송대말등대를 많이 찾는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사진찍기 좋은 녹색 명소 25곳’ 중 하나로 선정한 곳이다.

감포항은 1937년 읍으로 승격될 만큼 일제 때부터 번창했던 항구다. 감포(甘浦)라는 명칭은 지형이 甘자를 닮은 데서 유래했다. 감은사가 있는 포구라 하여 감은포라 부르다 음이 축약돼 감포로 부르고 있다. 현재 감포읍 인구는 5,646명이다. 31번국도 남쪽 32㎞에 울산이 있고 북으로 32㎞에 포항, 4번국도 서쪽에 보문관광단지가 있다. 감포는 전촌・나정・오류해수욕장과 활어 횟집 촌이 즐비하다.

감포항은 동해 남부 중심어항이다. 어민들의 중요한 삶의 터전으로 안전항해가 중요해 등대를 설치했다. 송대말등대는 감포항 북단 감포읍 오류리 588-3번지에 있다. 송대말(松臺末)은 글자 그대로 ‘소나무가 펼쳐진 끝자락’이란 뜻이다. 해송이 우거진 절벽에 등대가 있다. 감은사석탑을 형상화 한 등대이다.

감포 해안길 전경

 

감포는 신라의 동해구(東海口)이다. ‘동해로 열린 문’이라는 뜻. ‘삼국사기’ 문무왕편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우리 강토는 삼국으로 나누어져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제 삼국이 하나로 통합해 한 나라가 되었으니 민생은 진정되고 백성들은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그러나 동해로 침입하여 재물을 노략질하는 왜구가 걱정이다.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 지내라.”

그렇게 동해 망망대해를 밝히는 송대말등대 앞은 주상절리의 해안선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주상절리 바위와 바위 사이에 시멘트 구조물을 세워 축양장을 만들었다. 축양장에는 어민들이 잡아온 가자미, 전복, 광어, 고래, 돔 등을 보관했다. 담을 높게 만들어 물개도 키웠고 지붕을 만들어 덮어뒀다.

축양장 위쪽 바위에 화양정이라는 정자를 만들어 등대 앞 솔밭으로 잇고 다다미방 열 칸을 만들었다. 일본인은 바다와 솔숲으로 이어진 길을 오가며 망망대해를 감상했다. 정자에 앉아 팔팔 뛰노는 물고기를 바라보며 소일하고 횟감을 골라 먹으며 한국 색시에게 수발을 들게 했다. 그 여인이 아리라는 여성이다.

아리와 사랑에 빠진 하야시는 해방되자 아리를 데리고 본국으로 가려했다. 배가 떠나려는 순간, 아리의 오빠가 나타났고 아리는 총으로 하야시를 쐈다. 오누이는 독립운동 중이었고 그동안 아리가 번 돈은 독립자금으로 사용돼 왔었다.

감포 남방파제등대 야경

 

일본인들은 축양장 해산물을 일본으로 수송하는 과정에서 선박사고가 잇따르자 암초 위에 등간(燈竿)을 설치했다. 그들이 물러난 뒤 감포어업협동조합원들은 새로운 등간을 설치했다. 감포항을 이용하는 선박이 날로 늘어나 정부는 1955년 6월 30일 어민들의 안전을 위해 현재 등대 저리에 송대말 무인등대를 설치했다.

이후 육지의 항로표시 기능도 요청돼 1964년 12월 20일 대형 등명기를 설치해 유인등대로 전환했다. 본래 등탑은 백색 원형이었으나 2001년 12월 등대를 종합정비하면서 신라 문무왕의 은혜를 기리는 의미의 ‘감은사지 3층 석탑’을 형상화한 전통 석탑의 모습을 본떠 건립했다.

흰색 4각 콘크리트 구조로 높이는 21m. 불빛은 홍백색으로 34초마다 한 번씩 반짝인다. 이 일대가 얕은 수심 즉 천소구역을 알려주는 불빛이다. 등대에는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해 등대 와 인근 바다 자료들을 전시 중이다. 옛 등대도 고전적 분위기를 풍기고 진입로 계단도 볼거리 중 하나다. 등대는 동해바다를 조망하는 전망 포인트이자 바다색이 매우 신비롭다. 해저에 깔린 암초가 나풀거리는 모습이 보일 정도로 청정해역이다. 해양체험을 즐길 수도 있다.

등대 주변 해안선을 따라 걷고 언덕과 산등성이를 넘으면서 동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걷기코스도 있다. 파도소리와 함께 고즈넉한 해안풍경을 바라보기에 안성맞춤인 깍지길이다. 감포와 사람 그리고 식생 50가지 이야기로 엮어 만든 여행코스이다.

감포는 어떤 길을 가면 해국 길이고 어떤 길은 낯선 목조가옥이다. 어떤 길은 신라 유적지와 역사의 얼이 흐르고 어떤 길은 일본 유산을 동시에 껴안고 있다. 등대가 서 있는 자리치고 이런 아픈 역사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다.

등대 야생화 군락지

 

해국길에 일본 가옥 ‘다물은 집’이 있다. 일제 강점기, 개항과 함께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교육자 야시모토라가 살던 집이다. 깍지길은 마주잡은 깍지손을 의미한다. 이 길을 걸으면서 지난한 한국사의 뒤안길과 한국인의 깊고 후한 인정, 파도소리가 뒤집어 질 때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곡선의 길을 걸어온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읽을 수 있다.

여느 시골 장터처럼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들의 사투리가 흐르고 주름진 얼굴과 손바닥에 쥔 해산물들이 구부정한 삶과 겹쳐 지난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감포장은 깍지길 4구간에 해당하는데 가장 살맛나는 현장이랄 수 있다. 매달 3일과 8일로 끝나는 날에 맞추어 찾아가면 장날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제5구간 코스는 해안 길 드라이브를 즐기고 천천히 걸으며 아날로그 감성에 흠뻑 젖기 좋은 길이다.

감포 깍지길 개통식 장면(사진=경주시 제공)

 

깍지길을 걸으며 파도소리를 듣노라면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떠오른다.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해결된다는 신라 전설상의 피리, 그 만파식적 말이다. 신라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짓고 추모하는데,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동해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적의 군사는 물러가고, 병은 낫고, 물결은 평온해졌다는 이야기. 이 설화에는 신라가 삼국통일 후 흩어진 백제와 고구려 유민의 민심을 통합해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 했던 마음, 평화와 통일 염원을 엿볼 수 있다.

구등대와 감포항 전경

 

그 바닷길을 걸으며 파도가 부서질 때마다 이런 저런 생각의 갈피를 접었다 폈다가를 반복했다. 어민들이 출항하고 귀항할 때마다 제일 먼저 맞아주는 방파제등대에 서서, 저 편 송대말등대를 바라본다.

바람 불고 안개 자욱한 날, 혹은 어두운 밤에 어선과 어부들의 이정표가 되어준 등대. 등대는 그렇게 생명의 길, 희망의 깍지 손 역할을 하며 오늘도 그 자리에서 모두의 의지가 되고 희망의 불빛이 된다. 문의: 감포읍행정복지센터(054-779-8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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