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풍경이 있는 아침] 42 이해인, ‘파도의 말’

울고 싶어도

못 우는 너를 위해

내가 대신 울어줄게

마음놓고 울어줄게

오랜 나날

네가 그토록

사랑하고 사랑받은

모든 기억들

행복했던 순간들

푸르게 푸르게

내가 대신 노래해줄게

- 이해인, ‘파도의 말’ 중에서

파도

 

누군가에게 어깨 기대고 싶을 때, 외롭고 쓰라린 이 내 마음을 대신 표현해줄 때처럼, 든든하고 고맙고 행복할 때가 또 어디 있으랴.

시인은 파도를 통해 그런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고, 위로와 격려의 마음을 전한다. 부서지는 파도소리는 그냥 부서지는 것이 아니다. 너를 위하여, 말 못하는 너의 속울음을 위해, 크게 더 크게 부서지면서 대신 울어주는 것이다. 스르르 부서지면서 네 마음도 그렇게 평온해지길 바라는 것이다.

파도가 하는 말은 수녀가 누군가에게, 하나님이 수녀에게 주는 메시지일 수 있다. 우리는 숱한 사연을 보듬고, 그것을 지우며 살아간다. 저 바다의 파도가 밀물과 썰물을 반복하며 백사장에 스러지듯이. 그렇게 “오랜 나날/네가 그토록/사랑하고 사랑받은/모든 기억들/행복했던 순간들”을 대신 기억해주고 보듬어주면서. 이해인 수녀 역시 민들레 영토가 되어, 푸른 나무가 되어, 푸른 숲이 되어 사랑을 베풀고, 다시 씨앗을 뿌리며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다.

이 시는 이해인 수녀의 첫 시집에 실린 작품이고 수녀가 가장 애착을 갖는 시이다. 수녀는 2008년 병원에서 대장암 수술을 받고 마취에서 깨어났는데 자신도 모르게 이 시를 암송했다고 한다.

수녀는 50대인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라는 시집의 ‘시인의 말’에서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고 토로한 바 있다. 세월은 어느새 흐르고 흘러서 70대 삶에 이르렀다. 이제 그 빈집에 채울 것은 오직 사랑뿐이리라. “어떤 상황에서든지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때가 바로 봄”이라고 말했던 수녀.

이해인 수녀는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풍문여중, 성희여고, 세인트루이스대학교 영문학과, 서강대 대학원 종교학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76년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해 문단에 데뷔했다. 쉬운 어휘를 사용한 시와 에세이를 발표해왔고 그 행간에 흐르는 종교관이 종파를 초월한 것이어서 오래도록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마라도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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